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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커뮤니티 권익은 끈기있게 요구하고 챙겨야"

약자에게 위로와 희망 주고 포용과 나눔의 리더십 필요 민 변호사는 2011년 6월 안암 수술 후 항암 치료를 마친 후에도 그다음 해 6월 목 근처 림프종 수술을 받았다. 2년 전에는 또 턱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다시 한번 수술을 받아야 했다. 민 변호사는 세 번 째 수술을 받기 전 어쩌면 신경을 다칠 수 있어 말을 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았지만, 무사히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여전히 현역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 중인 민 변호사는 최근 들어 업무량을 조금씩 줄이는 중이다. 하지만 사무실도 정기적으로 출근하고 문의 전화도 계속 받고 있다. “대부분은 무료로 상담해주고 중요한 케이스만 진행하고 있다"는 민 변호사는 “흔히들 변호사는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나는 돈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일이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민 변호사 주위에는 청소년 시절 일으킨 각종 사건으로 상담을 받았다가 지금은 새 삶을 사는 한인들이 꽤 있다. 그중에는 잘 나가는 사업가도 있고, 변호사가 된 이들도 있다. 민 변호사가 교사 시절 지도했던 학생들도 가끔 찾아온다. “케이스가 끝났다고 돌아서지 않고 젊은 의뢰인이라면 등이라도 한번 두드려주고 격려했다. 희망을 보여주면 그들의 인생이 바뀌기 때문이다. 교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 격려를 많이 했었다. 그 기억이 평생 가는 것 같다.” 음악독서, 할아버지의 삶 민 변호사의 거실에는 소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마호가니 책상, 또 한쪽에는 대형 스피커를 갖춘 오디오 세트가 설치돼 있다. 민 변호사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다. 바이올린 선율만 듣고도 연주자를 맞출 만큼 음악을 즐겨 듣는다. 사무실에 나가지 않을 때는 거실 소파에 앉아 독서에 푹 빠진다. 아내 민씨와 손을 잡고 거주하는 알함브라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도 요즈음 느끼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두 손자에 대한 사랑도 끝이 없다. 현재 캘스테이트풀러턴에서 미디어 프로듀서로 근무하고 있는 민 변호사의 큰아들(크리스)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사는 며느리와 손자들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코로나19팬데믹으로 결혼식을 늦춘 둘째 아들(팀)은 영화 주인공들의 의상이나 자동차 등을 디자인하는 3D디자이너로 할리우드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다. '블랙팬서’의 영웅 채드윅 보스만이 입은 의상을 비롯해 영화 스파이더맨, 스크림, 한국영화 인랑 등에 참여했다. 팬데믹으로 많이 줄었지만,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만난 지인들과 전화하고 가끔 만나 식사하는 시간도 행복하다. 김영옥중학교명명안을 추진할 때 늘 장소를 빌려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카페 맥 조니 박 전 사장도 그 중 한 명이다. “죽어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최선을 다했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했구나’ 말해주는 칭찬을 듣고 싶다. 미래에 내 손자들이 나를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살아준다면 그걸로 내 인생은 행복한 것이다.” 50년 커뮤니티 봉사 큰 보람 전세계의 관심이 쏠린 미국 대선일이던 지난 5일. 민병수 변호사는 아내 캐롤 민씨와 함께 자정이 넘도록 TV로 선거 결과를 지켜봤다. 유망한 한인 2~3세들의 정계 진출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운 민 변호사는 “연방의회와 내각에 진출하고 도전하는 한인들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011년 한인타운 선거구를 단일화시키는 ‘선거구 재조정’ 캠페인 실패 후 LA지역 정치에 도전한 한인들이 늘었음을 그 예로 들었다. 민 변호사는 “나는 지금도 필요하다면 선거구 재조정을 위해 또 싸울 것“이라며 ”민권 문제는 실패 없이 성공도 없다. 실패해도 계속 부조리함과 싸워야 한다. 이제 한인사회는 돈도, 영향력도 갖췄다. 끈기를 갖고 집요하게 우리의 권리를 주류사회에 주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뢰인을 위해서라면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는 것도 피하지 않았던 민 변호사는 “한인 커뮤니티 대변인으로 나갈 때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며 “다음 세대는 침해하고 뺏는 리더십이 아니라 서로 돕고 함께 번영하는 리더십이 중요하다. 태평양 동쪽(한국)과 서쪽(미주 한인)의 리더십이 합쳐져 새로운 시대를 맞는 날이 50년 안에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는 비록 못 보고 가지만 아쉽지 않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이때까지 서러움은 다 씻고 간다. 행복한 삶이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민병수 변호사' 편은 이번 회로 마무리 됩니다. ◆미국 정계 진출 한인들 장원배·필립 민·신호범·알프레드 송… 미주 한인들의 정계 진출 역사는 한인 이민사가 시작된 하와이주에서부터 출발한다. 1958년 장원배씨와 필립 민씨가 하와이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1990년 3세인 고 재키 영씨가 첫 한인 여성 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한다. 1998년에는 주하원의원으로 입성해 22년간 의정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실비아 루크 장(한국명 은주) 의원이 있다. 장 의원은 한인 현직 정치인으로는 최장수 정치인이다. 또 주하원의원 2년, 하와이 시의원 14년, 주상원의원 15년 활동 경력을 가진 도나 메카도 김 전 의원, 3선을 성공한 샤론 하 주하원의원이 있다. 타주에는 입양아 출신의 플로리다 주하원의원 미미 맥앤드류, 오리건주 임용근 주 상원위원(5선), 워싱턴주 신호범 주상원위원(4선) 등이 꼽힌다. 캘리포니아주 정계에 한 획을 그은 이는 알프레드 송씨다. 1960년 몬트레이파크 시의원으로 당선된 후 주 하원과 상원의원을 역임하며 가주 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아시아계 이민자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 송 스테이션’으로 명명된 LA한인타운 윌셔-웨스턴 메트로 역 앞에 세워진 기념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0년에는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당선된 김창준 의원이 2년 뒤 연방하원에 진출하며 ‘첫 한인 연방 하원의원’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오렌지카운티 가든그로브 시의회에 정호영 시의원이 나왔고 2004년에는 최석호·강석희씨가 어바인 시의원으로 동반 당선됐다. 2007년에는 한인 여성으로 처음 미셸 박 스틸씨가 가주 조세형평국 의원으로 당선됐으며, 이후 오렌지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을 거쳐 올해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또 다른 여성 정치인으로는 가주 하원의원을 거쳐 연방의원으로 출마한 영 김씨가 있다. 2015년에는 데이비드 류(4지구)씨가 한인 최초로 LA시의원으로 선출됐으며, 2019년에는 존 이(12지구)씨가 2번째 한인 LA시의원으로 뽑혔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1-09

[민병수] "외눈으로 보니 안 보이던 세상이 보였다"

한쪽 눈만으로 왕성한 활동 한국어 교재 만들기도 앞장 출판비 없어 사방에 손벌려 민병수 변호사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다. 바로 타이맥스(Timex) 손목시계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는 이민자 커뮤니티에서는 로렉스 시계가 성공과 부의 상징이다. 하지만 민 변호사는 굳이 이 시계를 차고 다녔다. 토종 미국 브랜드인 타이맥스 시계는 가격대가 100달러 미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아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애용했다. “커뮤니티 활동은 돈을 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타이맥스 시계를 차고 다녀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함께 일하러 오라고.” 커뮤니티 봉사에 대한 민 변호사의 생각은 이처럼 확고했다. 2009년 7월 15일. 3년 동안 물밑작업 끝에 샤토가와 윌셔 불러바드에 세워진 학교 이름을 김영옥중학교로 부르는 명명안이 통과된 후 얼마 되지 않을 때다. 한국 정부 관계자가 민 변호사에게 만남을 청했다. 미팅 장소에 가니 다른 한인도 있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2세들이 한국어를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과서를 개발하기 위해 단체를 설립하려고 한다”며 민 변호사에게 창단 멤버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민 변호사는 교사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나 자격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그냥 참여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을 받자 수락했다.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의 시작이었다. 적금까지 깬 나 부회장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한국어 교육 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201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내 한글학교에 보급되던 한국어 교재는 한국의 교과과정을 중심으로 제작돼 학습 내용이 미국의 교육 시스템과는 잘 맞지 않았다. IKEN의 목표는 미국 학교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한국어 교재를 디지털로 개발해 이를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급하는 것이었다. 민 변호사가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한인 교육자들과 단체장들도 속속 창단 멤버로 들어왔다. 민 변호사는 전국한인회장 협회장이던 김승리 시애틀한인회장과 초대 공동회장을 맡다가 1년 뒤 2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IKEN은 한국어 교사들을 모아 디지털 한국어 교재 제작에 들어갔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교과서 제작 경험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러저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거의 2년 만에 킨더가튼부터 8학년용 교과서가 완성됐고, 디지털 출판을 맡은 제작사에 작업을 맡겼다. 하지만 설립 초창기 약속했던 정부의 지원금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당장 출판비로 2만 달러가 필요했다. 출판비 외에도 들어가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교과서 제작 초기에 적잖은 돈을 후원했던 김승리 초대 회장은 결국 물러난다는 의사를 밝혔다. 민 변호사도 사재를 털어 보탰지만 역부족이었다. 민 변호사는 함께 일하던 나영자 IKEN 부회장과 함께 아는 사업가들을 찾아다니며 후원금을 요청했다. 고석화 뱅크오브호프 명예회장, 토마스 정 전 나라은행 이사장을 비롯해 김송부씨, 김영환씨 등이 수표를 써줬다. 민 변호사는 “나 부회장이 가입했던 적금을 깨서 출판비를 지급해 무사히 교재가 나왔다. 그 돈은 나중에 정부에서 후원금이 들어올 때 맨 먼저 갚았다”며 "IKEN을 하면서 돈을 엄청 구걸하러 다녔다. 여러 선생님이 고생하면서 교재를 만든 걸 알기에 나 몰라라 하고 혼자 떠날 수 없었다. 그때 도와주신 분들에게는 지금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IKEN에서 발간한 디지털 교재는 지금도 IKEN 홈페이지(www.ikeneducate.org)에 가면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다. 판사와 농담 “애꾸눈 됐다” 탈 많았던 IKEN 디지털 교재도 완성된 2010년 말쯤이다. 왼쪽 눈 아래가 불그스레 변하고 볼록해졌다. 처음에는 벌레에 물렸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시력까지 점차 불편해졌다. 주치의를 찾아가자 ‘단순한 종양 같다’며 항생제를 처방했다. 주치의 말만 믿고 한 달이 넘게 꾸준히 약을 먹었지만 증세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수소문해 안과 전문의를 찾아갔다. 민 변호사의 눈을 정밀검사한 안과 전문의는 심각한 얼굴로 조직검사를 제안했다. 2011년 3월이었다. “안구암 진단을 받고 한쪽 눈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한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게.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왜 내가 암에 걸리면 안 되나. Why not me?” 그 해 여름 그는 왼쪽 안구를 적출하는 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하고 퇴원한 사흘 후에는 오렌지카운티 지역 법원에 계류 중인 케이스를 진행하기 위해 법원에 출두했다. 민 변호사는 “법정에서 판사가 눈에 붙인 반창고의 용도를 물어 ‘애꾸눈이 됐다’고 말하니 다들 농담인 줄 알고 웃더라. 나도 같이 웃었다”고 들려줬다. 민 변호사는 암이 발생하던 전과 다름없이 책을 읽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변호사 업무를 보면서 커뮤니티 활동도 계속 이어갔다. 6개월이 넘게 걸린 항암 치료도 민 변호사 특유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생각과 태도로 이겨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나서는 버몬트와 버질 인근에 신축 중인 초등학교에 의사이자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인 ‘닥터 새미 리’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다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찰스김초등학교에 이어 김영옥중학교 명명 작업을 함께 한 2세들과 다시 뭉쳤다. 한인 이름 학교 100년 대계 한국인의 이름을 딴 초·중·고등학교를 미국에 세우는 건 명실공히 100년 앞을 내다본 교육 프로젝트다. 이민 1세들은 떠나도 학교의 이름은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대 한인 이름을 명명한 학교가 줄줄이 탄생하자 타 아시안 커뮤니티도 한인 커뮤니티를 부러워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윌셔 불러바드와 6가 사이의 샤토에 세워진 중학교에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명명하는 프로젝트가 통과하기까지는 무려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닥터새미리 매그닛 초등학교를 준비할 때는 암 수술과 항암 치료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때였다. 그러나 민 변호사는 차분하게 자료를 준비했다. 또 지역구 재조정 관련 공청회에도 빠짐없이 다녔다. “한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그동안 내가 보던 사물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감사한 건 한 눈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됐다. 그래서 귀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1-05

[민병수] “한쪽 눈으로도 할 일이 남아 감사했다”

암으로 한쪽 안구 적출 수술 안대 끼고도 창피하지 않아 “목소리 없다고 무시하는 건 민주주의 가장한 독재” 일갈 2012년 3월 7일. LA시의회 정기회의가 열린 시청 340호가 200명의 한인으로 꽉 찼다. 이들은 모두 노란색 티셔츠 차림이다. 가슴에는 ‘아이러브코리아타운(I ♡ K-Town)’이라고 적혔다. 이날은 LA시의회가 최종 조율된 선거구를 채택하기 전에 열린 마지막 공청회였다. 발언권을 얻은 한인은 20여명. 이들의 목표는 4개로 나눠진 한인타운의 구역을 1개로 통일할 수 있도록 의원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발언권을 얻은 한인 중에는 민병수 변호사도 있었다. 그는 두터운 안대를 하고 나왔다. 암으로 안구를 적출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시기였다. 걸음걸이는 다소 느렸지만 짙은 회색 양복 속에 노란 티셔츠를 받쳐 입고 마이크 앞에 섰다. “납세 의무를 지키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민주주의다. 한인들은 LA 폭동을 이겨내고 LA시에 사회·경제적으로 기여하며 시민의 의무를 지켜왔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무시하는 건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Tyranny)다.” 굳어진 허브 웨슨의 얼굴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에 한인타운을 관할하는 허브 웨슨 10지구 시의원의 얼굴은 굳어졌다. 웨슨 시의원은 당시 자신의 정치력을 총동원해 한인타운의 선거구 단일화를 막고 있었다. 반면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지지하던 잰 페리(9지구), 버나드 팍스(8지구) 시의원은 한인 커뮤니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지지 의사를 보냈다. LA시의장이었던 에릭 가세티 시장은 입을 다물었다. LA폭동 이후 조용히 제자리에서 일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던 한인 커뮤니티는 선거구 재조정이 시작된 2011년 하반기부터 4개로 나눠진 한인타운 선거구를 단일화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요구한 건 남북으로 멜로즈에서 올림픽과 12가까지의 구역을 단일 선거구로 만드는 것이다. 2세들이 주도권을 잡고 나섰다. 그동안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했던 1.5세와 2세 단체들도 선거구 단일화안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다. 한인 커뮤니티 아트&레크레이션센터 추진위(K-ARC), 한미연합회, LA한인회, 한인민주당협회, 한인타운청소년회관, 한인가정상담소, 한미변호사협회, 한인 커뮤니티 변호사협회, 한인기독교커뮤니티개발협회(KCCD), 남가주한인음식업연합회, 가주한의사협회, 재미한인봉사자협회(PAVA), 한인타운노동연대, 민족학교 등이 연대했다. 남가주교회협의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선거구 단일화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인타운에 있는 이벨극장에서 처음으로 열린 커뮤니티 공청회에는 1000명이 넘는 한인들이 참석했다. 한인들 뿐만 아니라 한인타운과 인접한 방글라데시·몽골 등 타 커뮤니티에서도 참석해 지지를 보탰다. 거듭된 2세들의 도움 요청 민 변호사는 “2세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한미연합회 사무국장이었던 그레이스 유 변호사와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한 데이비드 류, 한미변호사협회 등이었다. 한인 커뮤니티가 다시 한번 도약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민 변호사는 기자회견은 물론, 공청회마다 꼬박 참석해 의견을 전달했다. 물론 검은 안대를 껴야 했지만, 그로 인한 창피함은 없었다. 민 변호사는 “한쪽 눈이 남아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에 오히려 감사했다”고 말했다. 한인 커뮤니티는 정치 네트워크를 가동해 LA시 선거구재조정위원회에 한인 커미셔너 2명이 임명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당시 뽑힌 한인은 헬렌 김 변호사와 로버트 안 변호사. LA한미연합회(KAC)는 아태법률센터(현 아시안진보정의연대)를 비롯한 아시안 단체들과 함께 LA시 선거구재조정위원회에 단일화된 지도를 제출했다. 이 지도에 따르면 단일화된 한인타운 구역은 동쪽으로는 버몬트 애비뉴에서 후버까지, 서쪽은 웨스턴 애비뉴에서 윌턴까지 내려가며, 남쪽은 올림픽경찰서가 있는 올림픽과 12가, 북쪽으로는 로즈우드~멜로즈까지 포함됐다. 이는 LA시의회에서 승인한 윌셔센터-코리아타운 주민의회(WCKNC) 경계선과 같다. 단일화된 한인타운은 에릭 가세티 시의원이 맡고 있던 13지구 선거구로 편입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한인타운은 1지구와 4지구, 10지구와 13지구로 나눠졌다. 그러나 13지구에는 한인타운 외에 필리핀타운과 웨스트레이크/맥아더 파크 피코-유니온이 포함돼 한인타운이 편입될 경우 아시안 유권자 비율은 34.8%까지 높아진다. 그만큼 아시안 시의원을 배출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셈이다. 민주주의는 투쟁·쟁취하는 것 반면 사우스 LA가 포함되는 10지구로 남게 되면 아시안 시의원 후보를 낼 기회는 갖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연방투표법에 따르면 LA 시의회 선거구당 인구 상한선은 25만2841명이며 이중 라틴계 인구가 절반을 넘어야 한다. 당시 제출된 선거구 지도는 경계선 획정 과정에서 인구수 오차범위(±5%)까지 포함돼 있어 채택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LA시의회에서는 밀실 회의를 통해 한인들이 제출한 단일화 지도를 기각시키고 오히려 한인타운을 더 잘게 나눈 새 선거구를 승인했다. 그 과정에서 한인 커뮤니티가 겪은 갈등과 후유증은 컸다. 정치헌금 때문이라는 게 주된 이유로 꼽혔다. 사우스 LA지역은 낙후된 지역이라 세금을 거둬들이는 게 쉽지 않다. 또 정치기부금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갈수록 성장하는 한인타운을 지역구로 갖고 싶어했다. 앞장섰던 민 변호사에게도 회유가 들어왔다. 민 변호사는 “한인 3명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내게 그만 나서라고 회유했다”며 “한인타운 사거리에 ‘민병수 변호사 광장’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말했다. 다음번 공청회에서 그들을 마주쳤지만 민 변호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이름을 단 광장을 만들 만큼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 민 변호사는 처음으로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뭐가 두렵나. 목소리를 낼 때는 내야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투쟁하고 쟁취하는 것이다. 한인 커뮤니티도 이 정신을 가져야 한다.” -------------------------------------------------------------------------------- 선거구 조정은 어떻게 하나 미국의 정치지도는 10년마다 새롭게 한 번씩 바뀐다. 연방 센서스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인구 비율에 따라 형평성에 맞게 선거구가 재조정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주는 선거구 재조정을 위해 ‘시민선거구 재조정 위원회(CRC)’를 구성한다. 민주당·공화당·무소속 신청자 120명을 1차 후보로 선발, 이중 최종 위원 14명을 결정한다. 지난 2008년 11월 주민발의안 통과에 따라 선거구 재조정 권한은 주의회에서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위임됐다. 커뮤니티의 변화는 무시한 채 의석확보만을 위해 지역구를 나눠온 주의회 권한을 압수한 것이다. CRC는 수차례 공청회를 통해 각 커뮤니티 의견을 반영한 뒤 선거구를 재조정한다. 선거구 재조정은 투표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이다. 선거구가 어떻게 구분되는가에 따라 지역 정치인이 달라질 수 있고, 단일 선거구로 할당되면 그만큼 정치력 결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인타운은 4개로 쪼개지면서 한인의 권익증진을 위해 노력할 정치인 배출에도 난항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난 2011년 한인타운은 선거구 재조정에서 한차례 고배를 마셨다. 10, 13, 1,4지구 4개 시의회 지구로 쪼개진 LA한인타운 선거구를 단일화해 13지구에 편입시키려던 한인들의 노력이 LA선거구재조정위원회(CRC)의 투표에서 찬성 7, 반대 14로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한인단체들은 기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게리멘더링식’으로 선거구 재조정이 이뤄졌다며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하고 LA시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주먹구구식 선거구 재조정은 다른 지역에서도 공분을 샀다. 자매 지역인 샌 게브리엘 밸리 커뮤니티와 분리된 사우스 엘몬테와 두 개 선거구로 나뉜 베트남 커뮤니티 ‘리틀 사이공’ 지역도 선거구 재조정 결과에 반발한 바 있다. 한편 다음 선거구 재조정은 2020 센서스를 바탕으로 2021년에 진행될 예정이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1-02

[민병수] 한국인 이름 딴 학교 LA에 줄줄이 탄생

“초교 이름에 전쟁영웅 곤란” ‘김영옥 대령→찰스 김’ 선회 미주 한인의 날 제정문 부탁 모두 외면…결국 밤샘 집필 미주 한인의 날 제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민병수 변호사는 다시 한번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한다. 바로 신규 공립학교의 이름을 한인 이민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1곳이 아닌 3개교에 달한다. 민병수 변호사는 당시 학교 신축붐을 타고 2006년 옥스퍼드와 2가에 신축된 초등학교 이름을 ‘찰스김 초등학교(Charles H. Kim ES)’로 명명한데 이어, 2009년엔 윌셔와 샤토에 오픈한 중학교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로, 2013년에는 버몬트와 버질 애비뉴에 세운 의료 매그닛 초등학교를 ‘닥터 새미리 매그닛(Dr. Sammy Lee Magnet)’으로 명명하는데 성공했다. 2000년 대 초반 LA통합교육구(LAUSD)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 학교 신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학교마다 한 반 학생 수가 평균 40~50명에 달했고 일부 학교는 2부제로 나눠 운영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LA교육위원회는 33억 달러 규모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채권발행안을 통과시키고 총 80개의 신규 학교를 건축했다. 당시 한인타운에 들어선 학교 수만 15개에 달한다. 한인 커뮤니티는 신축 학교 플랜을 반기면서도 비즈니스 중심가인 한인타운에 학교가 들어설 경우 발생할 경제적 타격에 대한 우려가 컸다. 실제로 학교 부지에서 운영하던 수십 곳의 한인 업소가 이전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이주비용 등의 문제로 교육구를 상대로 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김 교장의 결정적 조언 신축 학교 프로젝트에 따라 한인타운에는 속속 학교가 오픈했다. 버몬트와 뉴햄프셔가의 프랭크델올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12가와 호바트의 LA초등학교 ▶윌셔와 윌튼코너의 윌셔파크 초등학교 ▶놀만디와 올림픽 불러바드의 마리포사-나비 프라이머리센터 ▶베벌리 불러바드와 하버드의 하버드 초등학교 ▶파크뷰와 윌셔 불러바드의 찰스 화이트 초등학교 등이었다. 옥스퍼드와 2가에 신축 중이던 초등학교도 곧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2006년 초였다.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이었던 민 변호사는 2세들과 아이디어를 모았다. LAUSD 커뮤니티 홍보 담당이었던 홍연아씨, 미주한인재단 총무를 맡았던 권기상 가디나시 커미셔너와 회계였던 알렉스 차 변호사가 주축이 됐다. 또 한 명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중에 찰스 H. 김 초등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목사인 남편을 따라 한국 부임지로 가면서 은퇴한 샌드라 김씨다. 처음에 민 변호사는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생각하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그때 김 교장의 조언으로 ‘찰스 김’으로 변경한다. “샌드라 김씨가 초등학교에 전쟁 영웅의 이름을 추천하면 실패할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이름에 전쟁 영웅의 이름은 없다. 그때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우리 프로젝트는 100% 실패했다.” 찰스김 초등학교 명명 프로젝트는 빠르지만 조용히 진행됐다. 재단 이사였던 고 김지수 전 한미교육재단 이사장이 제공한 한국어 자료를 2세 회원들이 영어로 번역해 교육구에 제출했다.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홍보활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 교회와 커뮤니티 단체들의 도움으로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2006년 9월 12일. LA통합교육위원회는 옥스퍼드와 2가의 초등학교 이름을 ‘찰스 H. 김 초등학교’으로 짓는 명명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인타운에 세워진 학교에 한국인 이름을 달자는 아이디어에 의기투합한 1세와 1.5세, 2세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한인 사회에 주는 의미는 컸다. 정치권 활동 2세들의 가교 민병수 변호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미국에 온 나이를 따지만 1세가 맞지만, 미국화된 사고방식을 갖고 공부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2세에 가깝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2세들과 함께 일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민 변호사가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어릴 때는 식민 시절이라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로 가르치던 학교에 다녔고 해방 후 잠시 경기중학교에 다니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 왔기 때문이다. 민 변호사를 통해 정부나 기관에서 일하던 2세들이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됐다. 이들 중에는 한인으로 첫 LA 시의원으로 당선된 데이비드 류 시의원도 있다. 류 시의원은 한인타운을 관할하는 LA카운티 2지구의 수퍼바이저로, 남가주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흑인 여성 정치인 이반 버크 수퍼바이저의 보좌관이었다. 류 시의원은 ‘미주 한인의 날’ 제정을 비롯해 한인 커뮤니티에 필요한 다양한 관심 사항을 수퍼바이저에게 전달해 한인사회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민 변호사는 존 최 전 LA시장 보좌관도 언급했다. 민 변호사는 “꽤 똑똑하고 진실한 청년이었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돕고 싶어하던 마음이 뜨거웠다”고 함께 일한 기억을 떠올렸다. 17년째 의회서 선포되는 결의문 민 변호사가 작성한 ‘미주 한인의 날’ 결의문은 당초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고 활동하는 2세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미주한인재단 이사진이 손꼽은 인물은 아시안 최초로 미국 신문기자로 이름을 떨치던 이경원 대기자, 초대 하와이 이민자 자손이자 하와이주의 첫 한인 대법관으로 임명된 문대양(영어명 로널드) 대법원장, 피플매거진 최초 한인 에디터였던 이민지씨. 추진위원장이었던 민 변호사는 재단을 대표해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이 대기자는 편지를 받고 전화를 걸어 이리저리 내용을 질문할 뿐 참여 의사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 에디터의 경우 비서를 시켜 전화하고는 그 후 연락을 끊었다. 문 대법원장은 아예 봉투도 뜯지 않고 반송했다. 민 변호사는 “변호사 사무실 봉투를 사용했는데 그걸 보고 반송한 것 같았다. 판사로서 조그만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간만 흘러가고 진전은 없었다. 민 변호사는 직접 결의문을 작성하기로 마음먹고 문서에 담을 내용을 조사했다. 밤새 쓴 그의 결의문에는 미주 한인 초창기 이민사, 언어 및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일군 아메리칸 드림, 미국 사회에 기여한 역할과 미래를 담았다. 2003년 LA시와 가주 의회에 미주 한인의 날이 선포한 지 17년째. 지금도 매년 1월 13일 주의회와 LA시, LA카운티 의회장에서 그가 쓴 결의문이 선포되고 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28

[민병수] 총들고 지킨 한인타운…검사들은 '불법' 낙인

폭동 후유증 수많은 억울함 배심원 뽑으면 대부분 흑인 친분있는 흑인 변호사 도움 계획 범죄 입증 억울함 풀려 민병수 변호사가 커뮤니티 봉사 활동을 시작한 건 어릴 때부터 읽은 독서가 힘이 됐다. 민 변호사는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불공평한 게 너무 많고 약자들이 많이 당한다고 생각했다”며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닌데 나만 잘 살면 그게 행복할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1990년대를 떠올리는 민병수 변호사의 기억은 한 마디로 ‘아픔’이다. 떨리는 목소리는 LA 폭동 때 폭도로 몰려 억울하게 체포된 한인들에 대한 기억을 회고할 때마다 표정은 강렬해졌다. 법도 외면했던 한인 피해자들의 억울한 케이스가 법정에 넘쳤던 것이다. LA폭동이 발생하기 전 1991년 3월 16일 사우스 LA지역에서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자 한흑 갈등을 부추기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한인들은 돈만”차별적 기사 당시 한인들은 사우스 LA 지역에서 리커스토어를 많이 운영했고 흑인 갱단들은 한인 업소들을 노려 물건이나 돈을 훔쳤다. 강도를 당해 사망한 한인 업주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주류 언론들은 한인 이민자들이 흑인 커뮤니티에 들어와 돈만 벌어간다는 차별적인 기사를 쓰고 갈등을 부추겼다. 한인 업주들이 받는 피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민병수 변호사가 두 씨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를 의뢰받는다. 잉글우드 지역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는 한인 업주였다. 흑인 여자 고등학생이 물건을 훔치고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 차를 타고 두 블록이나 쫓아가 잡고 폭행한 케이스였다. 여학생은 경찰에 신고했고, 업주는 오히려 폭행 혐의로 체포됐다. “사건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잉글우드와 캄튼 지역 법원은 배심원을 뽑으면 거의 전원이 흑인이다. 두순자 사건으로 흑인 커뮤니티와 언론 모두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데 이 사건이 배심원 재판으로 넘어간다면 분명 한인 업주가 불리할 것 같았다.” 민 변호사는 고민하다 형사법 관련 콘퍼런스를 다닐 때 알게된 칼 존스 변호사를 찾아가 케이스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검사들 사이에서 실력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인 변호사가 나서는 것 보다 흑인 변호사가 맡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존스 변호사가 케이스를 듣자 딱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가해자가 한인이냐. 피해자는 흑인이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거절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 안 하던 존스 변호사는 케이스를 맡겠다고 했다. 너무 고마웠다.” 재판에 방해될까 숨어서 도와 존스 변호사는 조사관을 시켜 흑인 여학생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 평소 이 학생이 친구들에게 ‘한인 리커스토어를 털겠다’고 말한 증언을 끌어냈다. 또 폭행사건 이후 “딸의 대학교 학비가 생겼다”고 자랑하고 다닌 부모의 증언도 찾아냈다. 민 변호사는 숨어서 사건을 도왔다. 한인이 나설 경우 재판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계획된 범죄가 드러나자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조용히 부르더니 케이스를 기각시켰다. 폭동 이후에는 억울하거나 차별적인 이유로 기소되는 한인 케이스가 늘었다. 특히 폭도들로부터 업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섰던 한인들이 줄줄이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됐다. 민 변호사가 맡았던 사건은 더 황당한 내용이다. 주 방위권의 요청으로 백인 여성을 집까지 데려다주려다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된 케이스였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일 때문에 한인타운을 방문했던 이 백인 여성은 폭동으로 버스운행이 중단돼 집까지 돌아갈 교통수단이 없자 길에 서 있던 주 방위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방위군은 마침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차량을 세워 백인 여성을 데려다줄 수 있는 지 부탁한다. 한인이 운전하던 차 안에는 친구 2명이 더 타고 있었다. 운전사와 친구들은 흔쾌하게 백인 여성을 태운다. 문제는 이 때부터다. 베벌리힐스 진입로인 라시에네가 불러바드에 도착하니 폭도들을 막기 위해 배치된 베벌리힐스 경찰들이 쫙 깔렸다. 이들은 차를 세우더니 불심검문에 들어갔다. 그리고 차 안에서 총기를 발견하고 운전자를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백인 여성 태워주다 누명도 민 변호사는 “운전사와 친구들은 폭도들로부터 자신들의 업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한인타운에 가던 중이었다. 그때는 업주들 스스로 총을 들고 업소를 지켰다”며 “주 방위군의 부탁을 듣고 호의를 베풀었는데 오히려 범죄자가 된 셈”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사건을 맡은 민 변호사는 담당 검사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무죄를 입증하려면 당시 차량을 세우고 부탁했던 주 방위군을 찾아오라고 민 변호사에게 요구했다. 민 변호사는 “법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또 자신과 상관없이 일어난 폭동으로 재산 피해를 본 건 재해에 해당돼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며 “자신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소지한 걸 위법으로 몰아붙이는 검사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고민하던 민 변호사는 LA카운티 검사장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담당 검사의 상관을 만나 케이스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법 조항을 대며 따졌다. 설명을 다 들은 부장 검사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수 개월 동안 끌었던 케이스는 결국 ‘혐의 없음’으로 기각됐다. LA폭동 그 후 ABC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나이트라인에 출현해 당당히 이 사실을 꼬집은 한인이 있다. 바로 한인 2세 앤젤라 오 변호사다. 그는 앵커였던 테드 커플과의 대담에서 한인 사회 입장을 전달하면서 언어장벽에 갇혀 속으로 울분을 삭이던 한인들의 입이 돼줬다. 그는 폭동 이후 백악관 자문기구인 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으며, 한인변호사협회(KABA)의 회장을 역임했다. 또 웨스턴정의센터재단(WJCF)의 대표를 맡아 중재활동과 커뮤니티 교육에 앞장섰다. 같은 해 한인민주당협회(KADC)가 발족해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을 높이고 민주당 정치인들과 대화 창구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1993년 10월에는 폭동 당시 유일한 한인 희생자인 이재성(당시 18세)군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지원한 폭동 구호기금 123만여 달러를 재원으로 한인장학재단(구 4.29 장학재단)이 설립됐다. 1994년부터 2019년까지 25회에 걸쳐 총 937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97년에는 한미연합회(KAC)가 한인과 타인종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표 흑인단체인 마틴 루터 킹 재단과 손을 잡고 4.29 중재조정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는 LA카운티 분쟁해결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고용주와 직원 간의 갈등, 인종 분쟁 문제에 대한 조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LA폭동 15주년을 맞은 2007년 4월 29일에는 한인과 흑인, 라티노 등 다인종이 참여한 대규모 행진 ‘가교를 위한 발걸음’이 KAC LA지부 주최로 진행됐으며, 2008년에는 LA폭동 당시 한인사회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컬러의 충돌(Clash of Colors)’이 발표돼 1.5세와 2세의 호응을 받기도 했다. 데이비드 김 변호사가 제작한 이 다큐는 정치인과 사회운동가, 기자, 교수 등의 인터뷰를 통해 폭동이 한인 커뮤니티에 남긴 피해와 고통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26

[민병수] 변호사 11명 자비 소송…피해 업소들 배상 받아내

LA시 월권 들어 항소 제기 집단 소송 10곳에 2만불씩 기성 정치인 민낯에 실망 한인 정치력 신장 절실함 “여러분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흑인을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를 토해내야 합니다... (정적) 합법적으로.” 평소처럼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운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탐 브래들리 LA시장이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40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몇 시간 뒤 사우스 LA 중심가인 플로렌스와 노먼디가 만나는 사거리에는 흑인들이 속속 집결했고 경찰차를 부수고 백인 트럭 운전사를 구타하는 일이 발생했다. 민병수 변호사가 기억하는 LA 폭동의 시작이었다. “브래들리 시장은 평소 감정이 전혀 없는 차분한 톤으로 말하곤 했다. 몇 번 만나봤기 때문에 그의 성품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날 그는 다분히 감정적이었고 시민들에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어처구니없던 건 그렇게 흑인들을 선동했던 브래들리 시장이 며칠 후 한인타운에 와서 피해자를 돕고 싶다며 1000달러를 기부했는데 한인 피해자들은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것이다.” 브래들리 시장의 두 얼굴 “만일 그 때 브래들리 시장이 라디오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폭동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소환한 민병수 변호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LA 폭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인타운과 한인들이었지만 정치력을 동원한 공격은 계속 됐다. LA시는 폭동 이후 사우스 LA지역에 다시 문을 여는 한인 업소들에 치안을 핑계로 내세우며 가게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낙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주류 판매량도 제한시키는 등 운영 조건을 강화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시의원은 마크 리들리-토머스였다. 이를 막을 힘조차 없던 한인 업주들은 평생 지켰던 일터를 떠나야 했다. 1992년 말, 민 변호사는 곽철희(부회장), 토니 김(총무) 변호사와 함께 한미변호사협회(KABA) 산하에 한인법률권익재단을 급하게 조직하고 피해 업주들을 대변해 시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관련 경험도, 지식도 부족했던 만큼 멕시칸권익보호교육기금(MALDEF)을 벤치마크했다. 고형식, 김지영, 그레고리 백 등 11명의 한인 변호사들이 소송을 돕겠다고 자원했다. 이들은 소송비용도 직접 내고 매일 모여 서류를 준비했다. LA카운티수피리어 법원은 LA시의 불합리한 조건부영업제한(CUP)을 중단시켜달라는 KALDEF의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지만,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다. LA시가 토지조정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업소운영 조항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소 운영 조항은 토지 조정과 관련 없는 문제다. LA시의 월권행위”라고 항소하자 이번엔 LA시가 리커 라이선스는 가주 정부의 관할권이라며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모든 조건을 다 철회하겠다며 합의를 제안했다. 청년 가세티 삽들고 시늉만 민 변호사는 “당시 우리는 대법원까지 간다는 생각으로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에서는 대법원까지 가면 결과가 뒤바뀔 수 있다는 불안감에 타협을 요구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2년 만에 마무리된 소송은 LA시가 피해 업소당 2만 달러씩 손해배상 비용을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재판 결과를 끈기있게 기다리던 업주 10명은 결국 손해 배상을 받아냈다. LA 폭동에 대한 민병수 변호사의 감정은 지금까지도 복잡하게 남아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의 민낯에 대한 실망감, 피해자임에도 외면당한 한인 커뮤니티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인 정치력에 대한 아쉬움까지 섞였다. “폭동이 발생한 후 며칠 뒤 한인들이 평화 행진을 벌였다. 그 자리에 에릭 가세티 시장의 아버지(길 가세티)도 LA 카운티 검사장으로 나와서 연설했다. 함께 나왔던 청년 에릭은 삽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삽’은 그냥 정치적 퍼포먼스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주관과 목표도 바뀐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2003년 LA시의회에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한 일도 그 결과물 중 하나다. 특히 미주 한인 이민사가 100년을 맞은 해를 기해 이뤄진 일이라 한인사회에 주는 의미는 더 각별하다. 폭동을 극복한 한인 커뮤니티의 개척정신과 미국 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활동과 업적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주한인재단의 설립 뒤에는 하와이에서 토목 엔지니어링으로 성공한 2세 댄 김씨가 있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하와이 초기 이민자로, 한인으로 처음 자동차를 살 정도의 부를 이뤘다고 했다. 그는 이민 100주년이 다가오자 미국에 한인 역사를 알릴 것을 기획하고 남가주의 한인 단체장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가수 나훈아 100만불 기부 민 변호사는 “미주 한인 역사를 알리는 행사를 기획하려면 기금이 많이 필요한데 그는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알고 보니 가수 나훈아가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말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재단은 설립됐지만 어떻게 한인 이민사를 알릴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민 변호사는 ‘미주 한인의 날’ 제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다. 콜럼버스 데이도 있는데 한인의 날은 왜 없냐는 단순한 논리였다. 세부 사항은 LA시와 주 정부 등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며 재단에서 활동하던 1.5세와 2세들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 한인사회를 관할하던 탐 라본지 LA시의원 사무실의 김영지 보좌관을 선두로 케빈 머레이 주 상원의원 보좌관이었던 재니 김, 가든그로브시공무원 제니 이, LA통합교육구(LAUSD) 커뮤니티 담당관이던 홍연아, 변호사 알렉스 차 등이다. 결의안 내용은 민 변호사가 직접 썼다. LA시는 그해 10월 22일, 가주 의회는 2004년 1월 12일 미주 한인의 날 결의안을 채택하고 선포식을 갖는다. 민 변호사는 “한인 1.5세와 2세들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한인 사회의 업적”이라고 공을 돌렸다. 4·29 LA폭동 1992년 4월 29일 LA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이다. 1991년 흑인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들에 집단 구타당한 사건과 맞물려 같은 해 한인 업주가 흑인 소녀를 총격 살해한 일명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시작됐다. 주류 언론은 사우스LA에서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면서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한인들로 향하게 됐다. 당시 일부 뉴스에는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업주 두순자씨의 얼굴을 수차례 가격한 장면을 삭제·편집한 영상을 내보내면서 한인들이 흑인을 차별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특히 법원이 두순자씨에게 400시간의 사회봉사명령과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면서 흑인들의 분노는 더욱 확산됐다. 결국 폭동이 시작되면서 흑인들은 한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특히 한인 업소들을 대상으로 무분별한 약탈과 방화, 기물 파손을 자행했다. 당시 경찰은 한인 업소들이 몰린 지역을 방치한 채 베버리힐스, 할리우드 등 지역만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인들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 자발적으로 총기와 탄약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LA폭동은 4월 29일에 시작돼 5월 3일에야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사망자 53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인명피해를 남겼다. 이로 인해 약 2300개의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으며, LA시 피해 금액 7억 5000만 달러의 40% 정도인 4억 달러에 달하는 피해를 봤지만, 대부분이 지역·연방 정부로부터 보상받지 못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21

[민병수] 인종차별 기사 보고 잡지사 쳐들어가다

‘유해한 노란 인종’ 운운 제목 편집국장 만나 정정기사 요구 무료 법률상담에 150명 몰려 지금까지 34년간 이어져 보람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고 사무실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다. 민병수 변호사는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한인변호사협회(Korean American Bar Associations·KABA) 설립이었다. 1983년, 남가주 첫 한인 판사로 임명된 케네스 장 변호사(초대 회장), 윤영일 변호사(2대 회장), 민 변호사(3대 회장)가 주축이 됐다. 지금은 회원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명실공히 한인 커뮤니티의 대표적인 법조인 단체로 성장했지만, 시작할 때만 해도 회원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무료 법률상담을 시작했다. 민 변호사는 “당시 중국계나 일본계, 필리핀계 등 다른 마이너리티 커뮤니티도 각자 변호사협회가 무료 법률상담 행사를 열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며 “70~80년대 한인 커뮤니티는 모두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KABA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도 무료 상담을 계획했다”고 밝혔다. 불체 신분·건물주의 횡포 그 때도 상담 내용은 비슷 말이 쉽지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KABA 자체가 예산이 없었기에 무료 상담 장소를 빌리는 것도, 홍보하기도 쉽지 않았다. 반대 의견을 내는 회원들도 설득해야 했다. 이때 센트럴 라이온스클럽이 후원단체로 나섰다. 한미은행(당시 정원훈 행장)도 무료 상담 장소로 은행 사무실을 선뜻 개방했다. 민 변호사는 “중앙일보 등 한인 언론에 행사를 알리는 광고를 실었다. 또 한인타운에 있던 청과물상이나 동서식품 등 그로서리 업소, 식당 등을 다니며 행사 안내 포스터를 일일이 붙였다”고 전했다. 1986년, 5월 1일 ‘법의 날(Law Day)’ 주간인 토요일, 한미은행 뒤 조그만 사무실에서 열린 첫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150명이 넘는 한인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나온 한인 변호사들은 마이런 김(김명환), 서동성, 김인자, 데이비드 김, 아트 송, 나신명 변호사였다. 법대생이었던 곽철 변호사, 앨런 김 변호사 등은 접수를 도왔다. 가장 많은 상담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민 변호사는 이민법, 건물주와 세입자간의 갈등, 노동법으로 기억했다. 35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 당시 한인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법적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을 보면 이민 역사가 오래돼도 여전히 이민자의 삶이 어렵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땐 불법체류자들이 많아서 영주권 문제로 찾아오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또 불체 신분을 악용해 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착취하는 고용주를 하소연하는 종업원 케이스도 많았다. 또 지금처럼 건물을 소유한 한인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백인 건물주들의 부당한 횡포에 도움을 요청하는 세입자들도 꽤 됐다.” 이후 KABA는 매년 법의 날 주간에 맞춰 무료 법률 행사를 진행한다. 센트럴 라이온스클럽도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KABA의 행사를 후원한다. KABA는 한인 이민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90년대부터는 LA의 대형 비영리 법률기관인 LA법률보조재단(LAFLA)과 함께 매달 둘째 주 화요일마다 LAFLA 사무실에서 한인 변호사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무료 법률 상담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등 활동 폭을 넓혔다. 김영옥 대령이 적극 추천 법사위 커미셔너로 임명 민 변호사는 코리아타운청소년회관(KYCC)의 성장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LA카운티 수퍼바이저였던 케네스 한 수퍼바이저(1952~1992년)의 추천으로 LA카운티 산하 법사위원회 커미셔너로 임명된 민 변호사를 통해 KYCC가 카운티 정부가 지원하는 청소년 프로그램 예산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수퍼바이저가 민 변호사를 임명한 배경에는 고 김영옥 대령의 추천이 있었다. 민 변호사는 “김영옥 대령은 KYCC에 대한 애정이 깊고, 돕고 싶어했다”며 “김 대령의 추천으로 그 자리에 한인이 커미셔너로 뽑힐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 변호사는 “당시 KYCC가 받은 지원금은 연간 3만 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커미셔너로 일한 4년 동안 KYCC가 지원 단체로 선정돼 기금을 받았다. 정부 지원을 받은 첫 한인 단체였기에 뿌듯했고 보람을 느꼈다”고 소감을 들려줬다. 1983년 발족한 한미연합회(KAC)에도 함께 했다. KAC는 한인 커뮤니티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도자를 양성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함께 하자는 요청을 받고 초창기부터 2010년까지 이사로 재직했고, 나중에는 이사장까지 역임했다. KAC 초창기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타임스 매거진 시위다. 80년대에 들어 아시안 이민자가 늘어나는 만큼 인종차별 행위도 갈수록 노골적으로 발생했는데, 타임스 매거진도 메인 표지에 아시안이 미국에 들어오는 그림과 함께 ‘Yellow Peril Invading’ 제목을 달며 노골적으로 인종차별 행위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유해한 노란 인종의 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UCLA 법대생이자 KAC 초기 멤버였던 전동수 변호사, 제록스사 엔지니어였던 김기순씨, 서동성 변호사와 민 변호사는 베벌리힐스에 있던 타임 매거진 본사를 찾아갔다. 이들은 편집국장을 만나 정정기사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건물 밖에는 KAC 소속 대학생들이 경찰 허가를 맡고 길에서 소리를 지르며 시위를 벌였다. “미국에 유해한 게 뭔지 말하라고 따지고 정정기사를 요구하자 편집국장은 ‘아시안 인구가 급증한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실상 그들이 선택한 단어는 아시안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차별이었다.” 민 변호사는 “우리가 물러서지 않자 편집국장은 한인 커뮤니티 관련 기사를 준비해 쓰겠다는 말로 회유했다. 그 말을 믿고 돌아왔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기사는 보지도 못했다. 아쉽다”고 심정을 전했다. 이 사건 이후 KAC는 본격적으로 한인 커뮤니티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80년대 한인사회는… 비영리단체들 속속 등장 이민사회 문제 해결 앞장 1980년대는 덩치가 커져가고 있던 한인 사회를 뒷받침해 줄 커뮤니티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KYCC(한인타운 청소년회관)의 전신인 ‘KYC’로, 1975년 LA한인타운 크렌셔 불러바드에서 처음 뿌리를 내렸다. KYC는 최초 한인 청소년 담당 기관으로, 설립 당시에는 비영리기관인 ‘아시안 아메리칸 약물방지 프로그램(AADAP)’ 산하에 있으면서 이슈가 됐던 청소년 마약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그러던 1982년 한인사회 자체 청소년 단체 설립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독립하게 됐고, 이후 다방면으로 청소년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KYC는 1992년 LA폭동을 계기로 커뮤니티 이슈에 본격 관심을 가지면서 영어 단체명에 ‘Community’를 추가, ‘KYCC’로 변경했다. 지난 1983년 2월에는 지도자 양성 및 권익 신장 등을 목적으로 한미연합회(KAC)가 출범했다. KAC는 최초로 한인 유권자 등록 운동을 추진해 4만여 명의 시민권 획득과 유권자 등록을 돕는 실적을 냈다. 1983년에는 최초의 여성 변호사 고 이태영 박사와 한인 여성들이 뜻을 모아 한인가정상담소를 설립했다. 여기서는 가정폭력 문제에 초점을 맞춰 피해자 보호 및 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현재도 매년 6000명 이상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고 있다. 1986년에는 한인 건강정보센터(현 이웃케어클리닉)가 6가와 하버드에서 클리닉을 개원하며 처음 출범했다. 당시 영어도 서툴고 미국 의료 정보도 부족했던 저소득 한인들의 의료 및 사회복지 혜택 제공을 취지로 설립돼, 2013년에는 미국 내 한인 클리닉 및 비영리단체로는 처음으로 연방정부 인가(FQHC)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후 ‘이웃케어클리닉’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윌셔와 뉴햄프셔에 두 번째 클리닉을 개원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19

[민병수] 초짜 변호사, 감히 1심 판결을 뒤집어버리다

경찰 적법성 지적해 승소 인권보호법·판례로 남아 할리우드 유명 변호사도 “이제 진짜 변호사” 칭찬 민 변호사가 형사법 변호사로 입지를 굳히게 된 건 가주 검찰청의 항소로 대법원까지 간 케이스가 계기였다. 캘리포니아 변호사협회에서 발송한 공익변론 참여 공지문을 보고 선뜻 자원했다. 얼핏 사건을 보면 단순 빈집털이가 체포된 케이스다. 1976년 1가와 뉴햄프셔에 있는 4층짜리 아파트 건물에서 벌어진 일이다. 도둑이 문이 열린 빈집에 들어가 보석을 훔치다 때마침 그 동네에서 계속 발생하던 도난신고로 순찰을 하던 경찰에게 체포됐다는 게 요점이다. 20대 초반의 라틴계 범인은 순순히 자백했다. 하지만 3년 징역형을 선고받자 형량이 많다며 항소를 원했고, 공익 변호사로 참여한 민 변호사는 항소를 진행하게 됐다. 공익변론 공지문에 자원 “형사법에 따르면 경찰이 안에 들어갈 때 반드시 거주자나 방문자에게 알려야하고, 들어가는 이유도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들어갔을 때 위법 행위를 발견하면 체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케이스의 경우 경찰은 진입할 때 노크나 알리지 않았다. 아무리 침입자가 안에서 위법 행위를 하고 있어서 경찰이 조용히 들어갔다고 해도 자칫 총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웃 주민들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등 위험하다. 침입자에게도 거주자나 방문자에게 해당하는 룰을 적용해야 한다고 항소심 판사들에게 주장했다.” 민 변호사는 “사실 초짜 변호사가 항소심까지 가는 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만큼 극히 드문 일”이라며 “당시 내게 사무실 방을 빌려줬던 유대인 변호사는 항소심 승리 소식에 ‘당신은 이제 진짜 변호사가 됐다’며 축하해줬는데 그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 변호사가 빌려 쓰던 곳은 미드 윌셔의 빌딩 14층에 있던 해리슨 허츠버그 변호사 사무실. 그의 둘째 아들이 바로 가주 하원의원을 거쳐 상원의원으로 재임하고 있는 로버트 ‘밥’ 허츠버그(65)다. 현재 상원의장인 그는 최근에도 민 변호사에게 선거를 도와달라고 연락할 만큼 막역한 사이다. 민 변호사는 “허츠버그 변호사는 꽤 유명했다. 사무실에는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들이 의뢰인으로 찾아왔다. 그런데도 점심 때면 배심원 재판 이야기를 들려주고 경험을 나눌 만큼 소탈하고 사람이 좋았다. 항소심을 진행할 때도 어떤 증인을 세우고 어떻게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지 꼼꼼히 알려줬다”며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밥(상원의장)은 자주 아빠 사무실에 놀러 왔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모르는 사이인데도 막 껴안고 친근하게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들려줬다. 상원의장과의 오래된 친분 민 변호사가 이긴 항소심 판결의 파장은 커졌다. 이를 토대로 한 인권 보호법이 생겨나고 주 판례법에도 올랐다. 가주 검찰청은 즉각 대법원에 항소했다. 당시 항고심을 담당한 이는 실력파로 알려진 조이스 L. 케나드 검사로, 그는 2년 뒤 가주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다. 1년 뒤에 진행된 대법원 재판은 항소심보다 몇배나 어렵고 힘이 들었다. 9명의 대법원 판사들은 쟁점에 대해 반문하고 판례를 요구했다. 결국 항소심 판결은 뒤집혔다. 민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항소법원의 판결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걸 재판을 진행하면서 느꼈다. 그래서 판결문을 받았을 때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고 가주 대법원 앞에서 좌절했던 심정을 전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양한 케이스를 맡으며 변호사 초창기 시절을 보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인타운에는 음주운전 케이스가 많았고 또 이와 관련된 교통사고 사건도 많았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은 케이스도 6건 정도를 의뢰받았는데 다행히 모두 봉사 등 커뮤니티 서비스로 끝났다. 일반 살인사건 케이스도 꽤 여럿 있지만 민 변호사는 “살인 사건은 공소시효가 없다”며 관련 케이스를 언급할 때마다 단어 하나까지 조심했다. 가정폭력 사태도 비일비재했다. 피해자도 10건 중 1~2건은 남자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자 피해자들은 “창피하다”는 이유로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아서 사건을 조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잘못된 훈육 방식을 고집하다 경찰이나 학교의 신고를 받고 체포되는 부모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사건의 후유증은 위탁가정으로 보내지는 아이들이다. 그래서 카운티 아동국에 아이를 빼앗기고 되찾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한인 부모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민 변호사는 “형사 사건은 예고된 게 아니고 대부분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영어 구사에 서툰 한인들은 도움받기 쉽지 않았다. 당장 보석금을 못내 구치소에 계속 남아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혼 의뢰도 많았는데 민 변호사는 가능한 양쪽의 이야기를 듣고 조정을 하려고 애를 썼다. 민 변호사는 “이혼하려는 커플들을 설득해 없던 일로 되돌린 경우가 꽤 있었다. 돈은 벌지 못했지만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가장 든든한 ‘빽’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자리 잡으면서 점점 바빠졌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 법원에 가야할 때가 생겼다. 이때 가장 든든한 ‘빽’은 아내다. 결혼 후 캐롤 민씨는 남편 못지않게 일벌레가 됐다. 새벽 2시까지 법원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타이핑하고, 법원 스케줄 예약부터 사무실 의뢰인에게 연락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민 변호사는 “내가 한 일의 절반은 집사람의 공이다. 돈 때문에 뭐라 한 적도 없고 늘 지원해줬다”며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꼭 가족들이랑 함께 지내는 걸 철칙으로 삼고 지켰다”고 말했다. 80년대 초 한인사회는 민병수 변호사가 지미 카터 대통령(1977~1981년)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을 방문한 1980년대는 미국 내 아시안 커뮤니티가 본격적으로 성장할 때다. 카터 대통령은 한인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 등 각 커뮤니티 대표 100여명을 초청해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아태 자문위원회'를 도입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1989~1993년) 때에도 한인 무역업자 임청근씨를 비롯해 미국 태권도계의 대부 이준구(조지아)씨, 당시 LA한미공화당협회 고문이었던 미셸 박 스틸 OC수퍼바이저, 박선근(애틀랜타) 전국아태공화당협회 재정위원장 등을 대거 자문위원에 임명했다. 이중 스틸 수퍼바이저는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아태자문위로 임명된 최장수 자문위원이자 현재는 공동위원장이다. 1993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아태 자문위원회'이라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를 공식적으로 설치하고 위원장직을 워싱턴주 무역·경제개발국 커뮤니티 국장이었던 한인 마사 최씨에게 맡겨 한인 사회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민 변호사는 "당시 3박 4일 동안 백악관 각 청사를 방문하고 장관급들을 만나 당시 정책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며 "마이너리티였던 한인 커뮤니티의 각종 현안을 주류 정계에 직접 건의할 수 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14

[민병수] “친구를 쐈어요”…첫 살인사건 의뢰인은 고교생

변호사 양심에 갈등한 사건 검찰 잘못된 기소로 ‘기각’ 갱단이 판치던 70~90년대 한인타운 유명 사건 도맡아 이제 막 자격증을 딴 초짜 아시안 변호사에게 누가 의뢰할까. 당차게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은퇴 연금으로 1년은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모두 기우였다. “남편과 이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변호사님, 도와주세요.” 이혼을 의뢰하는 한인 고객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전화기는 또 울린다. “술 먹고 차를 몰다 걸렸어요”, “성범죄자로 억울하게 잡혔습니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마치 민 변호사를 기다렸다는 듯 고객들은 밀려들기 시작했다. 첫 살인사건을 맡다 어느 날이다. 누군가 다급히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인 남학생 3명이 서 있었다.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뭇거리며 들어온 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사람을 죽였어요.”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민 변호사는 “학생들에게 ‘지금 여기는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니 ‘경찰이 풀어줬다’고 하더라.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귀를 의심했다”며 “어린 학생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친구가 죽었다며 도와달라고 말하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사건의 전말이 기가 막히다. 친구 사이였던 4명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사망한 친구 집에 모였다. 그 친구의 집은 부모가 맞벌이해서 늘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놀러갔다고 했다. 이 친구는 얼마 전 아버지가 산 총을 꺼내 보여주며 자랑했다. 나중에 보니 그 아버지는 정식으로 라이선스를 받고 총을 산 것이었다. 난생 처음 총을 구경한 친구들은 서로를 겨누며 장난치다가 진짜 방아쇠를 당겼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당황한 친구들은 시신을 차에 태워 병원에 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병원의 신고로 경찰들이 왔다. 그러나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경찰은 학생들의 진술을 듣더니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다른 아시안 학생을 용의자로 체포한 것이다. 알고 보니 경찰의 추궁에 다른 아이가 죽였다고 둘러댄 아이들의 진술에 따른 것이다. 용의자로 체포된 학생은 갱단으로 전과가 있었기에 아무리 “내가 아니다”라고 주장해도 경찰들이 믿지 않았다. "무조건 묵비권 행사하라" 민 변호사는 학생들에게 “조사가 다시 나오면 무조건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같이 나가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음의 갈등이 시작됐다. 그는 “경찰에 허위 진술을 한 학생들의 변호를 맡자니 양심에 걸렸고, 그렇다고 변호사의 자격을 버릴 순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설명했다. 진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다음 날부터 벌써 학급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민 변호사는 “그 소문을 들은 급우의 부모가 담당 검사한테 사실을 얘기해 사건이 재수사에 들어갔고, 무고하게 감옥에 있던 아시안 갱단원은 풀려났다”며 “검사가 케이스를 기각했다. 다른 한인 친구들은 아예 검찰에 기소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됐다”고 전했다. 그때 남은 친구 세 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 사건 후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어렴풋이 한 명은 한국에 가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다”는 민 변호사는 “나의 도덕적 양심과 법조윤리가 극적으로 상충했던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동경암 사건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후 한인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굵직한 사건에 민 변호사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1987년 LA의 한인 갱단과 한국에서 온 조직폭력단이 벌인 살인사건이 한인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동경암 살인’으로 불린 사건 뒤에도 민 변호사가 있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갱단원이었던 한인 용의자는 식당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인 손님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한 뒤 총기를 무참히 난사했다. 범인이 노린 건 LAPD 한인 수사관이던 한상진 경관이었다. 하지만 무고한 식당 손님 1명만 총에 맞아 숨졌고, 다른 1명이 크게 다쳤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민 변호사가 맡은 의뢰인은 당시 총을 쐈던 용의자의 10대 한인 룸메이트였다. 경찰은 이 룸메이트도 같은 갱단원으로 의심해 압박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민 변호사는 “그 당시엔 한 사람 이상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갱단으로 여겼다. 당시 한인 가정들은 맞벌이를 많이 했고, 아이들도 갈 곳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잦았다. 그러다 나쁜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상황을 전했다. 결국 룸메이트는 혐의를 벗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 변호사가 묵비권을 행사할 것을 당부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민 변호사는 “경찰의 압박 수사를 받으면 하지도 않은 범행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의뢰인에게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당부했다”며 “결국 경찰은 공범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모래시계파 아이칸 사건 비슷한 사건으로 1995년 발생한 모래시계파 아이칸 살인사건도 있다. 모래시계파 단원 최상수(당시 27세), 김만수(당시 27세)가 라이벌이었던 한인 갱단 ‘코리안 플레이보이스’ 두목 임치성(당시 23세)에 총격을 가해 살해한 사건이다. 민 변호사는 사건의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한인 김기범씨의 변호를 맡았다. 김씨는 한인 갱단이던 ‘코리안킬러스’의 멤버로 당시 사건 현장이었던 아이칸 카페에 모래시계파 단원들과 함께 있었다. 민 변호사는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선처해 주겠다며 압박한다. 범인이 아니더라도 조사실 의자에 앉아있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돼서 이실직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잘못 말하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의뢰인에게 묵비권을 사용할 것을 다짐받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묵비권을 지킨 김씨는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이 확인돼 무죄로 풀려났다. (※ 본 편에서 유독 묵비권 부분이 강조된다. 비록 오래전 일이지만 민 변호사는 구체적인 사건 내용과 변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아마도 직업상 윤리에 따른 신중함으로 이해된다.) --------------------------------------------------------------------------------- ▶당시 한인사회는 경제적인 기반이 조금씩 닦여가던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인사회에는 갱단들이 등장한다. 주로 10대들로 구성됐던 이들은 빈집을 털고 마약을 일삼았다. 당시 유명했던 한인 갱단 조직은 ’아메리칸 버거‘. 80년대엔 ’코리안 킬러스(Korean Killers)‘라는 조직이 한인타운을 장악한다. 이후 ’코리안 플레이보이스‘가 나오며 세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한인 여성 갱단도 있었다. 이들은 ’코리안 걸스 킬러스(Korean Girl‘s Killer)’로 불렸다. 한인 갱단들이 있던 한인타운은 당시 악명 높았던 멕시코 갱단이나 흑인 갱단들도 함부로 넘보지 못했을 정도로 조직력이나 실력이 막강했다. 민 변호사는 “입단식 때 관행으로 담뱃불을 몸에 지졌는데 이 흉터가 갱단원임을 말해주는 표식이었다. 한인 청소년들이 경찰에 체포되면 소매를 걷어 올려서 갱단원인지를 확인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들려줬다.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온 조직폭력배들로 구성된 ‘모래시계파’ 조직이 활동했다. 당시 경찰들이 파악한 규모는 30~40명 선. 이들은 한인타운 내 업소들에서 소위 말하는 ‘자릿세’를 거두고 금품을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2세들로 주축이 된 한인 갱단들과 세력 다툼을 자주 벌였다. 아이칸 살인사건도 그런 세력 전쟁의 하나였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12

[민병수] 퇴근길 댄스 모임에서 아내를 만나다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소” “그럼 결혼하면 되잖아요” 낮엔 교사, 밤엔 로스쿨 학생 남가주 두번째 한인 변호사로 1960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가을부터 공립학교의 풀타임 교사가 됐다. 첫 부임지는 웨스트 코비나에 있는 샌호세 초등학교. 웨스트 코비나는 1950년대 오렌지밭이었지만 이후 개발붐이 일면서 주택단지가 들어섰고 유입되는 인구도 급증하면서 학교도 여기저기 생겼다. 샌호세 초등학교는 교사 자격증을 받기 전 교생 실습을 하던 학교였는데, 민 변호사를 잘 봤는지 교장의 추천으로 정식 교사가 됐다. 민 변호사는 그곳에서 5년 동안 5~6학년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교사들의 초기 연봉은 월 400달러 정도였다. 경력과 자기계발에 필요한 수업을 들은 점수 등을 토대로 월급이 매년 인상됐는데 결혼할 때쯤에는 월 1700~1800달러까지 벌어 빠듯하지만 혼자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민 변호사는 1965년 형(병화)이 있는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이주한다. 의대 졸업 후 인턴십과 레지던시를 마치고 의사가 된 형은 혼자 지내려니 외롭다면서 동생을 부른 것이다. 민 변호사도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형과 살기 위해 시카고로 옮겨 그곳 해몬드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LA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했던 민 변호사는 친구도 없고 외로운 시카고 생활이 힘들었다. 게다가 시카고 교사 월급은 LA보다도 적었다. 결국 1년 만에 다시 짐을 쌌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민 변호사는 변호사 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는 1975년 5월까지 코르테즈 초등학교에서 6년, 윌로우중학교에서 1년을 더 가르쳤다. 연애 시절의 엇갈린 기억 1968년 8월. 민 변호사는 LA에 있는 YMCA에서 열린 댄스 믹서(Mixer·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음료수를 먹으며 친분을 쌓는 간단한 파티)에서 지금의 아내(캐롤 민)를 만난다. 당시 25살이던 민씨는 오리건주 동부 에코 출신이다. 한인은 커녕, 아메리칸 인디언과 카우보이가 있던 시골이다. 가주에 있는 대학(캘폴리 포모나)에 진학하기 위해 LA로 온 민씨는 당시 YMCA가 운영하는 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렌트비가 저렴해 젊은 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곳이다. 민씨는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윌리엄(민 변호사의 영어 이름)을 처음 만났다. 정장에 하얀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웃겼다”고 첫인상을 회고했다. 민 변호사는 몬터레이 파크 인근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코르테즈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그날따라 복도를 지나가는데 학교 게시판에 댄스 믹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퇴근하는 길에 갔다.” 민 변호사의 회고다. 알고 보니 민 변호사는 춤을 즐겼다. 파티에서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됐고 민 변호사는 그 때 아내에게 “일본을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뒤 만남에 대한 기억은 여느 커플처럼 재미있게 엇갈린다. 민 변호사의 경우 “단순히 관심이 있어서 물어봤는데 갑자기 캐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알고보니 여행사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번호 책자를 찾으러 간 거였다”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웃으며 옆에서 듣던 민씨는 “일본에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본 건 맞지만 전화하겠다는 말만하고 헤어졌다”고 정정을 했다. 민씨는 “나중에 우리가 결혼하자 로컬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때 윌리엄은 내가 일본에 같이 갔다고 말했다. 나는 속상해서 수정해야한다고 했는데, 윌리엄은 오히려 눈길을 끄니 그냥 놔두라며 재미있어했다”고 했다. 전화 통화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게다가 서로가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진 게 아니었기에, 전화가 올지 긴가민가했다. 무엇보다 그때는 복도 로비 중앙에 설치된 전화기 한 대로 모든 사람이 통화하던 때였다. 민씨는 “파티에서 헤어질 때 번호를 물어보길래 전화번호 책자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진짜 전화를 할까 굉장히 기다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달 뒤쯤 민 변호사는 민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때부터 둘의 데이트는 시작됐다. 도박하는 심정으로 변호사 도전 그 때쯤 민 변호사는 법대 입학을 준비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인 변호사가 되는 길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노스웨스턴 로스쿨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려니,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던 데이트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민 변호사는 민씨에게 당분간 만날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낮에는 일 때문에, 밤에는 대학원 수업 때문에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럼 결혼을 하면 어떻겠냐고 먼저 말했다”는 민씨는 발그레해진 뺨을 손으로 누르며 “그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주부터 둘은 결혼반지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민 변호사의 부모는 단번에 승낙했다. 이미 민 변호사의 형과 여동생도 백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에 쉽게 이해하셨다. 반면 신부 측 부모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민씨는 “나와 달리 2차대전 참전군인이었고 보수적이었던 양아버지는 결혼 얘기를 듣자마자 반대했다”며 “나중에 윌리엄을 만나더니 맘에 들어하셨고 그때부터는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결혼 후에는 주말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글렌데일의 로스쿨로 옮겼다. 큰 아들이 태어난 후부터는 매일 밤 샌드위치 하나를 싸들고 USC 도서관을 찾아갔다. “변호사 시험공부는 말 그대로 도박하는 심정이었다. 변호사가 되더라도 동양인에게 누가 사건을 의뢰하겠나 싶었다. 그래도 매일 도서관과 집을 오가는 길에 기도했다. 시험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1975년 5월. 두 번의 도전 끝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가주에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 번째로 탄생한 한인 변호사였다. 다음 달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은퇴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쓸 종잣돈이었다. --------------------------------------------------------------------------------- ▶당시 한인 사회는 1960~70년대에 아시안은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방센서스국 통계에 따르면 1960년 가주의 경우 아시안(31만 8376명)은 주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다. 반면 백인(1445만 5230명)은 92%로 압도적이었다. 70년대에 들어와 아시안(55만 2364명) 인구는 전체의 2.8%로 조금 늘었지만 여전히 백인(1776만 1032명)이 주를 이뤘다. 이때 한인 인구는 6만913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변화는 있었다. 1967년 6월12일 연방 대법원은 백인과 타인종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했다. 1912년 12월 시본 로든베리 의원이 제안한 헌법 수정안이 통과된 지 55년 만이었다. 민병수 변호사는 “결혼할 때쯤 다행히 타인종과의 결혼이 합법이 됐다. 아이러니한건 나는 이걸 인식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그런 법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타인종 간의 결혼은 계속 증가 추세다. 70년대 31만건으로, 전체 기혼 커플의 0.7%를 차지했지만 2008년도엔 3.9%에 이른다. 또 다른 변화는 1965년 국가별 할당제를 없애는 이민법(INA)이 통과되면서 한인 이민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1970년대 전반까지 간호사, 의사, 약사 등 전문기술 자격증을 갖고 있는 이민자들이 중심을 이루다 후반부터는 가족 초청에 의한 이민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LA한인타운은 1960년대부터 한인들이 쇠락해 가는 지역의 상가와 사무실 건물을 저렴하게 구입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1968년 이민 온 고 이희덕씨가 ‘코리안 빌리지(Korean Village)’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영빈관(당시 3014 w Olympic Blvd)’을 개업해 커뮤니티 장소로 제공하는 등 노력하면서 올림픽 대로와 크렌쇼 대로 중심으로 한인 상점이 줄을 이어 들어섰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07

[민병수] “팔을 부러뜨려서라도 군에 남아라” 기구한 훈련병

8주 훈련 마친뒤 이민국 호출 “불체자 신분은 입대 안된다” 멕시코 가는 길의 귀인 두 명 재정 보증에 학비도 지원해줘 LA의 날씨가 사막의 겨울처럼 춥던 1954년 11월 어느 날. 민 변호사는 미군에서 징병 통지서를 받는다. 한국전쟁 때문에 18세 이상 유학생도 병역 의무를 질 때였다. 당시엔 90일 동안 미군에 복무하면 영주권을 주던 시절이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민 변호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묵묵히 신병훈련소로 떠났다. 민 변호사가 도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80마일 떨어진 몬터레이 카운티에 있는 포트 오드 훈련소였다. 육군사령부 소속 보병 부대 훈련소였던 이곳은 지금도 행정건물, 막사, 메스홀, 텐트 패드, 하수처리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국방부가 운영하는 국방외국어대학(DLI)에서 언어 훈련 기지로 사용한다. IQ 검사에 사관학교 제의 신병 훈련은 8주 동안 진행됐다. 이제 부대를 배치받고 한 달만 더 있으면 기다리던 영주권을 받는다. 게다가 신병훈련소에서 뜻밖의 제의도 받았다. 대대장이 민 변호사를 호출하더니 “우리는 너 같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 군대에서 무료로 사관학교에 보내줄 수 있는데 가겠느냐”는 권유였다. 알고 보니 군대에서 신병 150명에게 실시한 IQ 테스트 결과 민 변호사가 두 번 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1등은 폴리텍 고등학교에 같이 다닌 일본계 친구 케이 아카마수였다. 민 변호사는 “사관학교 입학 제의를 받는데 망설일 게 없었다. 영주권이 해결됐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사관학교에 가겠다고 했다”며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난 것 같았다”고 당시 심정을 표현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훈련을 받으러 숙소를 나오는 길에 검은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잠시 후 부대원 몇 명이 호출됐다. 민 변호사의 이름도 불렸다. 알고 보니 차량 탑승자들은 이민국에서 나온 직원들이었고 불려 나간 신병들은 모조리 배경 조사 과정에서 걸린 외국인들이었다. 민 변호사는 이민국 직원에게 사실대로 신병훈련소에 오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며칠 뒤 이민국은 “미군이 징병 과정에서 실수했다. 당신은 불법체류 신분이기 때문에 귀국해야 한다”는 통지서를 민 변호사에게 발송했다. 훈련소도 당황했다. 민 변호사를 대변한 육군 법무병과(US Army Judge Advocate General‘s Corps) 소속 법무관은 “이민국이 반대하기 때문에 군대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다”면서도 “이민국에서 훈련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편지만 받아오라”고 민 변호사를 설득했다. 짐승 취급한 이민관의 매정함 민 변호사는 살리나스 이민국에 찾아갔다. 육군 법무관의 이름을 대며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자 이민관은 민 변호사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의 책상 앞에는 이미 그와 관련된 서류가 쌓여 있었다. “이민관은 내가 말하는 내내 실실 웃었다. 짐승처럼 취급하는 듯한 그의 비웃음과 행동을 보면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부대에 돌아와 짐을 싸자 부대원들은 말렸다. “팔을 부러뜨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어라.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은 군대에서 쫓아내질 못한다.” “샤워를 하고 밖에서 잠을 자면 지독한 독감에 걸린다. 그러면 2주 정도 입원할 수 있다.” 민 변호사의 사정을 아는 부대원들은 갖가지 아이디어를 주면서 90일을 채우라고 설득했지만 민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민 변호사는 이민국에 자진 출국을 신고하고 2개월여 만에 LA의 집으로 돌아왔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멕시코에 가서 비자를 받고 재입국하는 길이다. 민 변호사는 “내게 남은 마지막 길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해봤기에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만 남았다”고 말했다. 멕시코로 가는 길에는 은인 두 명이 동행한다. 한 명은 민 변호사가 의지하던 형 헨리 이씨. 당시 영어를 잘하는 한인은 드물었기에 그의 동행은 민 변호사에게 힘이 됐다. 민 변호사보다 7살 정도 많은 이씨는 당시 아시안 인종차별주의가 팽배하고 백인 중심이었던 대학에서 한인으로는 처음 학생회장을 맡았을 만큼 역사적인 인물로 꼽힌다고 민 변호사는 회고했다. 민 변호사의 아버지가 워싱턴DC에 있는 국무부에서 일할 때 한국에서 온 공무원들을 통역하던 이씨를 처음 만났고, 그 후 이씨는 가족이 있는 LA로 올 때마다 민 변호사를 찾아오면서 친분이 생겼다. 잊을 수 없는 젠킨스 박사 또 다른 은인은 나중에 민 변호사의 후견인이 된 룰루 마리 젠킨스 박사다. 젠킨스 박사 역시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됐는데 아이오와에 있는 여대 학장직을 은퇴한 후 LA에 살면서 가끔 민 변호사의 가족을 만나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곤했다. 민 변호사가 비자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했던 재정보증서도 젠킨스 박사가 해줬다. 비자를 받고 돌아온 민 변호사가 대학에 진학할 때 4년간의 학비를 지원해주고, 나중에 교사가 될 것을 권유한 것도 젠킨스 박사였다. 민 변호사는 “독신이었던 젠킨스 박사는 우리 가족과 이해관계도 없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학비도 취직하면 그때 갚으라고 했다. 그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여행자처럼 보이기 위해 편하게 옷을 차려입었다. 영어가 유창한 아시안 남성이 운전하고 금발의 백인 중년여성이 동행한 차량을 의심해 막아서는 미국 국경수비대원은 없었다. 민 변호사는 무사히 멕시코 국경을 통과해 티후아나에 있는 미국 영사관을 찾아가 학생비자(F1)를 받고 안전하게 LA로 돌아왔다. 드디어 체류신분이 해결된 민 변호사는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라번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후 교사의 길을 걷는다. --------------------------------------------------------------------------------- ▶당시 한인 사회는 헬기 사고로 떠난 은인 미국이 징병제를 실시한 건 1783년 독립전쟁 때다. 당시에는 추첨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1차 대전 이후 400만명의 군대가 필요해 징병이 이뤄졌다. 이때 정부는 체계적인 징병제를 위해 1917년 ’선발징병청(Selective Service System·SSS)‘을 설치해 21~30세의 모든 남성을 병역자원으로 등록시켰다. 한국전쟁(1950∼1953년) 당시에는 징병제로 152만 9537명이 입대했다. 이때 징집은 긴급하게 실시됐다. 2차대전(1939년~1945년)이 끝난 후 미국은 1948년부터 99만 명 이하까지 감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SSS는 징병 대상자를 18.5세부터 26세까지로 하한선을 낮췄고, 복무 기간도 기존 21개월에서 24개월로 늘렸다. 민병수 변호사의 영주권 취득 여정에 함께했던 헨리 이씨도 자원 입대해 일본 오키나와에서 복무했다. 민 변호사에 따르면 이씨는 한인 최초로 ’월드뱅크‘에 입사했으나 근무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본지는 월드뱅크 측에 이씨의 근무기록을 문의했지만 5일 현재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월드뱅크 기록에서 1962년 8월 태국으로 향하던 헬리콥터가 추락해 직원 2명이 숨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 변호사는 “당시 헨리형은 ’우리 세대에 아시안이 내각에 들어갈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난 그때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을 보면 그때 그 형의 선견지명에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10-05

[민병수] 하루아침에 불체자 신세…영주권 꿈 가물가물

부친 귀국후 체류신분 사라져 이민국은 걸핏하면 출두 요구 변호사 요구액만 엄청난 금액 상원의원 도와도 번번이 실패 아버지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생계도 문제였지만 가족들은 졸지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이민국에서 온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국 법원 출두 통지서였다. 외교관의 가족 자격으로 비자를 받고 입국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를 법원에 나와서 설명하라는 통지서였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 모두 법원에 출두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민국의 문턱은 높았고, 직원들은 쌀쌀맞고 차가웠다. 민 변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들려줬다. “한국은 전쟁으로 엉망이었다. 미국에 올 때 살던 집도 팔고 왔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살 곳도 없었다. 판사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했지만 우리 가족을 냉정하게 쳐다보며 ‘그건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더라.” 쌀쌀맞은 이민국과 줄다리기 그 때부터 이민국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미국에 합법적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LA다운타운에서 ‘일을 잘한다’고 소문난 미국인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그 변호사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수수료로 1670달러를 요구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돌이켜 보면 그 변호사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수중엔 돈이 없었고, 포기해야 했다. 이민국에서는 툭하면 출두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 때마다 민 변호사는 가족 대표로 법원에 출두해 갖가지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 아버지의 비서로 근무했던 백인 여성을 찾아가 이런저런 방법을 물어보니 LA다운타운에 법률도서관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길로 찾아가 이민법 관련 서적을 뒤졌다. 영어도 아직 완전히 구사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단어 하나하나를 이해해야 했다.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길은 찾지 못했다. 그렇게 포기할 무렵,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이민법 조항을 발견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도 유효한 이 법은 특수상황을 참작해 영주권을 발급해주는 법으로, 연방 상원의원이 개인 법안을 상정해야 한다. 25불 주고 상원의원에 편지 마지막 길이라 생각하고 연방 상원의원에게 법을 상정해달라는 부탁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당시엔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서사무소가 있었다. LA다운타운에 있는 대서사무소를 찾아가 25달러를 지불하고 대필을 부탁했다. 25달러도 민 변호사에겐 큰돈이었지만 변호사가 요구한 거액의 수속비용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수신인은 당시 캘리포니아주 연방상원의원인 윌리엄 노울랜드(William Knowland·1908- 1974). 다수당이던 공화당 원내 대표로 영향력이 막강했던 정치인이다. 민 변호사는 대서 직원이 타이핑한 편지를 들고 무작정 오클랜드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보좌관에게 편지를 의원에게 전해달라고 사정했다. 절실한 마음이 통했던지 보좌관은 “기다리라”고 하고는 민 변호사를 돌려보냈다.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일 노울랜드 의원 사무실에서 연락이 없다면 한국으로 추방되는 길만 남았다. 그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무작정 기다렸다. 호텔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따르릉”하고 전화가 울렸다. 노울랜드 의원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상원의원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그는 노울랜드 의원이 편지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됐다면서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노울랜드 상원의원은 약속대로 민 변호사의 체류 신분을 구제하는 법안을 1955년 상정한다. 법안 이름은 ‘민희식과 부인 및 자녀들 구제안((S. 1140·사진)’이다. 일반적으로 연방 상원의원들이 상정하는 개인 구제 법안들은 의회에서 그냥 통과됐다. 하지만 당시 노울랜드 의원과 정치적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던 웨스트버지니아주 연방상원의원인 할리 킬고어(1893-1956)가 사사건건 딴지를 걸던 시기였다. 킬고어는 법안 스케줄을 보류시켰고 의회 회기가 마감되면서 법안은 자동으로 폐기됐다. 민 변호사는 “노울랜드 의원 사무실에서 그해 말 편지를 보내 법안이 폐기됐다고 알려줬다. 그때의 좌절감은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노울랜드 의원은 내년에 법안을 다시 상정하겠다고 어린 민 변호사에게 약속했다. 노울랜드 의원은 약속대로 1957년 다시 법안(S. 614)을 상정시켜 법사위원회를 통과하고 하원으로 넘어가면서 통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하원에서 법안 처리를 미루면서 또다시 폐기됐다. 지금도 이 법안은 워싱턴 도서관에 원본이 남아있다. --------------------------------------------------------------------------------- 전쟁고아가 입양되던 시절 민 변호사가 영주권을 받은 1950년대는 전쟁통에 생겨난 고아들의 미국 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시기였다. 1954년 한국 정부는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버려진 혼혈아동들을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아동양호회'를 설립했다. 정전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약 8000명의 아이가 미국 기독교 가정에 입양됐다. 민 변호사의 사정을 듣고 도움을 줬던 윌리엄 노울랜드 연방 상원의원은 1945년부터 1959년까지 가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오클랜드 트리뷴 신문사 사장의 아들이기도 해 지역에서도 유지로 꼽혔다. 노울랜드 의원은 외교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 냉전 후 국가 외교정책 우선순위와 자금지원, 특히 한국을 비롯한 베트남, 포모사, 중국, 나토(NATO)에 관한 외교정책 마련에 기여했다. 외교정책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만큼 노울랜드 상원의원은 한국을 잘 이해했다. 또한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가주 내 한인 커뮤니티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그렇기에 민 변호사의 사정도 쉽게 이해했다. 1958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후 아버지 조셉 R. 노울랜드 뒤를 이어 오클랜드 트리뷴의 편집장이자 발행인이 된 그는 나중에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만큼 정치인으로서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불우했다. 마지막에는 도박으로 9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탕진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09-30

[민병수] 식당·상점서 허드렛일…50센트 팁에 설움 복받쳐

LA총영사관이 문을 연 지 1년 6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민희식 총영사는 1950년 7월 미 국방부의 요청을 받아 민간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전쟁을 지원한다. 당시 연합군이 추진하던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민병수 변호사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서해의 밀물 현상이나 파고 등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민 총영사는 국방부에서 3개월가량 근무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국무부에 민간고문으로 다시 한번 채용돼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53년 한국으로 귀국해 한국주재 미 대사관 경제과에서 일하고 은퇴한다. 아버지가 총영사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민 변호사와 가족들의 생활은 그럭저럭 살 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한국으로 귀국하자 당장 생계가 막막해졌다. 싼 렌트비를 찾아 여기저기 집을 옮겨 다녔다.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민 변호사의 큰 형(병화)은 시카고 의대에 입학해 멀리 살고 있었다. 둘째 아들인 민 변호사가 고스란히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유학생들 챙긴 독립운동가 학교는 휴학했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아시안 남학생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유색 인종이 백인과 마주치는 행동조차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민 변호사는 동네 그로서리 상점에서 물건을 배달하거나, 식당에서 그릇을 치우는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급사 일도 했다. 윌셔가와 뉴햄프셔에 있던 고급 백화점 아이매그닌(I. Magnin)에서 한번은 나이가 지긋한 백인 여성의 쇼핑백을 차에 실을 때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민 변호사를 불러 세웠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장갑 낀 손으로 지갑에서 10센트짜리 다섯개를 꺼내더니 민 변호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팁’이었다. 민 변호사는 “그 돈을 보는데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공손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섰지만 ‘내가 이렇게 팁까지 받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됐나’ 싶어서 서글펐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놨다. 여름방학에는 중가주 프레즈노에 한인 김호씨가 운영하는 과수원에서 일했다. 농장주 김씨의 영어 이름은 찰스 H. 김. 2006년 LA 한인타운 내 공립학교에 한인 이름으로 처음 명명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인 김씨는 당시 한국인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과수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인이 개발한 ‘넥타린’으로 불리는 승도복숭아의 판매권을 양도받아 큰돈을 벌었다. 이 농장에는 매년 여름이 되면 유학생들이 찾아가 일을 했다. 당시 노동자의 임금은 시간당 75센트. 두 달 동안 농장의 막사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 평균 10시간 일하고 나면 500달러 정도를 벌어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사무직으로 옮겨 공부할 마음 지역 유지였지만 낡은 트럭을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던 김씨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에는 격려금이자 장학금으로 많게는 1인당 1000달러씩 주기도 했다. 민 변호사는 좀 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유학생들이 꺼리던 포도 따는 일까지 했다. 민 변호사는 “복숭아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익은 열매를 뚝뚝 따내는 거라 쉽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낮은 줄기 사이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열매를 따야 한다. 종일 땡볕에서 그렇게 10시간 동안 일하면 나중에는 다리가 펴지지도 않고 손도 마비가 왔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딴 포도 열매는 그 즉시 체에 펼쳐놓고 햇볕에 말린다. 당시 임금은 시간제가 아니라 ‘1체당’ 받기에 조금도 쉴 틈이 없다. 그렇게 말린 포도는 건포도로 재생산돼 전국에서 판매됐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막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던 민 변호사는 우연히 팀스피릿 노조 사무실에 사무직으로 취업이 되면서 육체노동을 면하게 된다. 민 변호사는 “안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면서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 한국전 무렵 한인사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민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당시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과 그들의 자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전쟁고아였던 한국인 아이들이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되기도 했다. 유학길에 오른 학생들도 늘었다. 유학생과 연구원 중 상당수가 공부와 훈련을 마치고 미국에 정착했다. 1950년대 한국인 1만 5000명 정도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국토안보부 이민통계 연보(yearbook of immigration statistics)에 따르면 1950~1959년까지 영주권 취득한 한인 수는 4845명이다. 1955년 민병수 변호사는 한인 유학생협회 학생회장을 맡는다. 당시 한인 사회에는 교회 말고는 특별한 커뮤니티 공간이 없었다. 민 변호사는 처음으로 한국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미국사는 한인들을 결집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처음 음악회 형식으로 기획한 행사는 합창, 독창, 전통악기 연주회, 무용부터, 사랑에 빠져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까지 더해지며 규모가 커졌다. 전문 의상·분장팀까지 초청했다. 행사 날 400여 명의 한인이 몰렸다. 당시 입장료는 1인당 2달러 50센트.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여 달러 정도로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한인들은 행사에 환호했다. 민 변호사는 그날 입장료로 모은 1000달러를 한국 고아원이던 ‘중앙각심학원’에 기부했다.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정준모 박사가 기부금을 전달받았다. 민 변호사는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죽을 때 다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뭐하러 쟁여두나.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이게 진짜 사는 재미 아니겠나”라고 웃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09-28

[민병수] 아시안이 무슨 변호사, 자동차 정비나 배워라

민병수 변호사(87)는 LA한인사회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고 민희식(1948년 10월~1960년 8월) 총영사의 둘째 아들로 지금까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했다. 지난 1회는 경기중 3학년 시절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야했던 이야기가 실렸다. 7층짜리 반도호텔 보다가 오색찬란 SF 야경에 감탄 자유로운 교정 너무 행복 배에서 나온 음식은 화려했다. 조반에, 스프타임, 티타임까지 하루에 6~7번의 음식이 제공됐다. 스테이크 등 고기 요리도 넘쳤다. 엄마와 누나(한국명 병순), 여동생(병연)은 멀미로 고생했지만, 아버지와 형(병화), 남동생(병유), 민 변호사는 뱃멀미 없이 식사시간이 되면 열심히 먹었다. 좋은 음식도 며칠뿐. 점차 한국 음식이 그리워졌고 배에서의 생활도 지쳐갔다. 그렇게 2주를 보내고 12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본 도시는 아름답고 황홀했다. 가장 놀란 건 거리의 자동차들이다. 게다가 오색찬란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거리 곳곳의 상점들은 크리스마스트리와 각종 장식으로 잔뜩 꾸며져 있었다.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보였다. 민 변호사는 “그때만 해도 한국은 거리에 자동차가 하루 한두 대 지나갈까 말까였다. 게다가 가장 높은 건물은 서울에 있는 7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며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넘치는 자동차들과 골든스테이트 브리지의 장엄한 모습에 압도당했다”고 당시 받았던 문화적 충격을 설명했다. 폴리텍 고교에 편입 민 변호사는 폴리텍고등학교 10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에도 우수 고등학교로 꼽혔던 폴리텍은 지금은 패서디나에 있지만 그때는 LA다운타운인 워싱턴과 플라워 코너 건물에 있었다. 한국과 달리 자유로운 수업 풍경과 학생들의 생활이 부러웠다. 민 변호사는 “당시 한국 고등학교는 군대식 교육이었다. 소위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그런 교육을 받다가 미국의 학교에 가니 머리도, 옷도 자유롭고 운동장에 줄을 서지도 않았다”며 “자유롭게 공부하는 문화 속에서 공부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낭만적인 황홀감도 잠시. 영어와의 힘든 싸움이 시작됐다. 지금처럼 이민자를 위한 영어학습과정(ESL)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매일 몸으로 부딪혀 배워야 했다. 민 변호사는 “아버지는 어릴 때 유학했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했지만 자녀들은 전혀 몰랐다”며 “그나마 학교에서 점수를 잘 받은 과목은 수학과 물리 과목 정도였던 것 같다”고 공부의 어려움을 전했다. 배심원 앞 변론을 꿈꿨다 인종차별도 겪었다. 쳐다보지도 않는 백인 학생들과는 아예 친구 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교사들로부터 받는 차별은 그의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줬다. 민 변호사는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에 대한 책을 읽고 막연히 배심원들 앞에서 피고인을 위해 싸우고 치열하게 변론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했다. 하지만 부족한 영어 실력은 둘째치고, 대학 진학 카운슬러는 상담시간에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밝히자 “그것도 좋지만 자동차 정비를 하면 취업을 잘할 수 있다”는 말로 그의 꿈을 단번에 꺾었다. 미국 오기 전까지만 해도 경기중학교에 재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던 영민한 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계속됐다. 한국에서는 친구도 많고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조금씩 말수가 줄었고 조용하게 변했다. 우울한 고교 시절을 보낸 그는 변호사 꿈을 잠시 접고 포모나 인근 라번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 1940년대 후반 한인사회는 폴리텍고등학교는 아시안 학생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같이 학교에 다녔던 한인 학생이 있다. 바로 케네스 장(한국명 병조·1982년 작고) 판사.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온 장 변호사는 폴리텍에서 1년을 다녔다. 샌타클라라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남가주 첫 한인 변호사로 이름을 남긴다. 이후 장 판사는 민 변호사와 함께 한미변호사협회(KABA)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이 됐다. 장 판사는 1980년 한국인 1세로는 몬터레이카운티 수피리어법원에 근무한 백학준 판사(2016년 작고)에 이어 두 번째로 가주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남가주에서는 첫 한인 판사였다. 당시 그를 임명한 주지사는 젊은 시절의 제리 브라운이다. 지방법원 판사의 자격은 10년 이상 검사로 재직했거나 개업 변호사의 경력이 있어야 했는데 고 장 판사는 1968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고문 변호사로 미국 정부를 위해 주한미군 처우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한국 정부와 협상하고 초안한 경력, 샌타클라라카운티 검사 경력, 개인 변호사 경력 등이 고려돼 임명됐다. 민 변호사는 “제리 브라운 주지사는 이미 한인 커뮤니티가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지사 취임 직후에는 한인 커뮤니티를 찾아 주요 인물들과 만나 의견을 들었고 한인 판사로 장 판사를 지명했다”고 들려줬다. 안타깝게도 장 판사는 임명된 후 얼마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민 변호사의 또 다른 기억은 아시안에 대한 차별이다. 미국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해 두 번이나 금메달을 차지한 다이빙선수 새미 리 박사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오렌지카운티 쪽에 집을 사려고 했던 새미 리 박사는 주민들의 반대로 집을 살 수 없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알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했다. 민 변호사는 “닉슨이 오렌지카운티 출신이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금메달을 두 번씩이나 미국에 안겨준 새미 리 박사도 이랬으니 일반 사람들은 어땠는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09-23

[민병수]남기고 싶은 이야기…민병수 변호사( 1933~ )

미주 한인사회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120년 만에 미전역에 25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규모로 발전했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초기 이민자들의 피땀 흘린 노력과 집념이 있다. 하지만 한인사회의 토대를 만들고 발전시켜온 1세대가 하나둘씩 시간의 흐름 뒤로 사라져가는 시점이다. 이에 중앙일보는 창간 46주년을 맞아 주요 한인 인사들의 자료와 기억을 발굴, 정리하여 글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한다. 앞으로 연재될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는 한인사회의 성장기와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담겨질 예정이다. 또 한인 후손들에게 가르칠 역사와 교훈도 찾아 들려준다. 첫 주인공은 민병수 변호사(87)다. 민병수 첫회: 중3 때 인천 부둣가 흙 한 줌 주머니에 넣고… **약력 형사법 전문 변호사. 197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한인으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번째 변호사로 합격한 후 45년째 현직 변호사로 활하고 있다. 1983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했으며, 현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의 전신인 한인청소년센터(KYC) 이사(1975-83년)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LA카운티 산하 법률위원회 첫 한인 커미셔너(1983-87년)이기도 했으며,LA폭동 이후에는 한미법률재단(KALAF) 회장을 맡아 폭동 피해 업주들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미주 한인의 날 제정과 한인타운내 찰스 김 초등학교, 김영옥중학교, 새미리초등학교 이름 명명에 앞장섰다. 이후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초대 회장( 2010년), 애국동지회 고문(2013년)을 역임하며 한인 사회에 공헌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01년), 재미동포 첫 대한민국 법률대상(2009년), 세계한인검사협회 주최 평생공로상(2018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개척자상(2018년) 등을 수상했다.

2020-09-21

[민병수] 중3 때 인천 부둣가 흙 한 줌 주머니에 넣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첫 주인공은 민병수 변호사(87)다. LA한인사회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고 민희식(1948년 10월~1960년 8월) 총영사의 둘째 아들로 LA에 온 후 지금까지 남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했다. 초기 한인사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인사회의 정치·사회적 성장에 기여한 그의 활동과 암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1.5세와 2세들의 친구로 남아 있는 민 변호사에게 한인 2~3세들에게 남겨줄 교훈을 들어봤다. <1> 추방 통보 받고 멕시코로 독립자금 댄 큰할아버지 걱정 일찌감치 부친 미국으로 유학 10학년 편입…영어 수업은 고문 유학생들은 대부분 하급 노동 차창 밖이 희미하게 밝아진다. 미국에 남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마지막 남은 동아줄을 잡기 위해 멕시코 국경을 향해 떠나는 길이다. 자정을 지나 출발한 차 안은 덜컹거리는 소음만 있을 뿐 조용하다. 새벽을 맞는 프리웨이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과 나무, 차들의 모습을 뜨거워지는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국경서 체포되면 그걸로 끝 아버지(고 민희식 초대 LA 총영사)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 남은 가족들의 고생은 말할 수가 없었다. 외교관 가족으로의 체류 신분이 만료돼 이민국(INS·현 이민서비스국)에서 발송한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추방 통지서가 수시로 도착했다. 하지만 한국은 전쟁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지만,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멕시코에 가서 유학비자를 받아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짐과 서류를 챙겼다. 이미 체류 신분이 만료된 상황이라 국경에서 체포되면 가족들이 있는 LA로 돌아올 수도 없다. ‘다시 이곳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지금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울컥해졌다. 조선 시대 명문가였던 민 변호사의 가족사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조국의 아픈 역사와 그 궤를 같이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댔던 큰할아버지(민영달·이조판서)는 혹시라도 그 사실이 발각돼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 싶어 민 변호사의 부친을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보냈다. 1915년 콜로라도주에 있는 광산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1924년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할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에 임명된 아버지는 1년도 채 안 돼 LA 총영사로 발령받아 1960년까지 12년 동안 재직했다. 경기중 3학년 때 미국으로 아버지를 따라 LA로 출발한 건 1948년 11월 25일. 민 변호사는 경기중학교 3학년을 마친 15살이었다. 2차 대전 이후인 당시 항공사는 판아메리칸 항공사(1991년 도산함)를 포함해 2개뿐이었다. 티켓 가격은 700~800달러 정도로 비쌌지만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했다. 반면 배편은 300~350달러 정도로 저렴했다. 당시 미국을 왕래하는 배는 미군과 화물을 실어나르던 배였다. 미국으로 출발을 앞둔 민 변호사는 인천 부둣가에서 흙 한 줌을 주머니에 넣었다. 민 변호사는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게 너무 신났다. 한편으론 집과 친구들을 두고 떠나는 게 슬펐다. 언제 한국에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먹에 담긴 흙은 조국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나 자신의 맹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 1949년 한인 사회는 LA 총영사관이 문을 연 것은 민 총영사가 도착한 2개월 후인 1949년 1월이다. 당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와 5가가 만나는 곳에 있었다. 직원은 총영사 외에 주사 한 명, 사무원 한 명이었다. 초대 LA 총영사의 주 업무는 한인들 인구조사를 하는 것과 25명가량이던 유학생들을 돕는 것, 둘로 갈라져 있는 동지회와 국민회를 화해시키는 것, 한국이라는 나라를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것 등이었다. 남가주 한인은 1, 2, 3세를 모두 합해 1000명이 채 안 됐다. 유학생들은 언어 문제뿐만 아니라 심한 인종차별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민 변호사는 “대부분 유학생은 하급 노동밖에 할 수 없었다”며 “어머니(전부귀·1998년 작고)가 힘든 유학생들을 집에 초청해 식사를 자주 대접하곤 했다”고 전했다. 반면 LA 다운타운은 지금과 사뭇 다른, 깨끗하고 화려한 상업중심지였다. 사람들은 다운타운에서 쇼핑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겼다. 지금은 사무실 거리로 바뀐 윌셔가에도 고급 백화점들이 즐비한 백인들만의 거리였다. 가족들이 살던 공관은 지금 LA 한인타운에서는 조금 떨어진 21가와 그래머시에 있었다. 백인 거주자가 대다수였던 지역이었다. 당시만 해도 흑인은 거리에서 지나가는 타인종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억압된 분위기에 살고 있었다. 한인들은 지금의 한인타운이 결성되기 전이라 일본계와 중국계 등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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